최종 편집일 : 2024.03.29 (금)
[글밭 산책] --------------------------------------- [시] 무 늬 이 용 섭 사람과 나무는 결로써 말을 한다 기름진 흙과 햇볕, 적당한 물기와 사랑이 촘촘한 세월과 한 몸을 이루어 이쪽 저쪽 밀고 당기고 엇갈리며 비로소 곱고 단단한 제 무늬가 된다 아프고 뒤틀리는 절망의 순간도 돌아보면 아름다운 무늬가 되고 옹이진 상처조차 고운 결이 된다 톱날의 세월이 제 살을 저미며 깊은 상처를 남길 때 사람과 나무는 향기로운 저만의 무늬로 말을 한다 작...
[글밭 산책] [수필] 그 립 다 권 영 호 나이가 든 탓일까. 아니면 삶이 팍팍해서 일까. 요즈음은 보고 싶은 사람이 부쩍 많아졌다. 어둠 살이 내려앉은 방죽으로 올라섰다. 방죽 한가운데 나 있는 길 양쪽, 풀숲에서 놀란 풀벌레들이 후드득 튀어 올라 바짓가랑이에 매달린다. 그들의 안식처를 예고 없이 침입한 무례를 저지른 것 같아 내딛는 발걸음의 숨을 한껏 죽였다. 한참을 걸었을까. 발걸음을 멈춰 섰다. 휙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몇 발짝을 걷다가 또 뒤를 돌아섰지만 역시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글밭 산책] ----------------------------------------------------- [시] 철 쭉 구 은 주 가을이 빈 들판에 앉았는데 철쭉이 피었다다 놓아버린 듯무심한 낯빛 누구는 안쓰럽다 말하고누구는 철없다 말한다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달려가밤 이슥토록 기다리다 돌아온 그 날이때가 아니었나 보다너를 보고 깨닫는다철모르고 살아온 내가안쓰럽단 말이지잘 피었다 가란 말이지봄날이 새로 온 것 같다 -------------------------------------------------- 작...
[수필] 쓸쓸하다 박월수 (수필가) 얽히고설킨 관계가 나를 더 쓸쓸하게 했다. 흐르는 시간을 말 안하고 살 수 있는 풍경과 바람과 햇살로 채우고 싶었다. 오래 그리던 산골로 떠나왔다. 종일 눈에 들어오는 건 사람이 빠진 멎어있는 풍경이다. 받는 일에만 익숙해진 전화기는 언젠가부터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조용하다. 고독을 즐기려던 내 맘엔 어느새 알 수 없는 적막만이 남았다. 죽은 소나무를 손질한다. 적당하게 굽은 모양이 다탁으로 쓰면 어울릴 것 같다. 길이를 반으로 쪼개어 곱게 갈무리한다...
[글밭 산책] [시] 간이역 김 교 희 어쩌다 목적지를 지나쳐 가로등 졸고 있는 역사(驛舍)에 서니 별과 달이 반갑게 눈인사를 건넨다 새벽 공기 들이마시며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떠난다는 것인지 가끔은 물의 계단을 뛰어오르며 빛나는 등지느러미 보여도 주며 누구의 마중 없이도 어머니 품 같은 곳으로 되돌아가는 연어의 꿈 밭 같은 낡은 그곳에는 ----------------------------------------- 작가의 말 생존의 굴레에서 벗...
[수필] 상선약수(上善若水) 유감 성 정 애 어릴 적 내게 물은 공포였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장마가 지면 학교 옆의 늪은 물 높이를 키워 운동장 끝에 있는 미루나무 밑동을 잘라 먹고, 운동장 안까지 슬금슬금 쳐들어오면 하굣길까지 삼켜버리곤 하였다. 그러면 우리는 길을 버리고 논두렁을 지나 수풀 우거진 산길을 돌아 집으로 와야만 했다. 고향 동네 입구에는 제법 큰 저수지가 있었다. 여름 방학이면 초동들의 물놀이터였고 겨울이면 팽이치기와 스케이트장이 되어 온 동네 아이들을 불러모았다. 그런 즐거운 놀이터에서 사달...
[글밭 산책] [수필] 산은 영원하다 이 일 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은 언제나처럼 무성한 녹음으로 우거진 나무들을 넉넉한 품으로 안고 있다. 키가 크고 작은 나무, 몸통이 굵고 가는 나무, 잎이 넓고 좁은 나무……, 나무의 모양은 각양각색일지라도 모든 나무를 분별없이 너그럽게 품고 있다. 우거진 푸른 잎새들은 바뀌는 철을 따라 색색 물이 들었다가 마르고 떨어져 제 태어난 땅으로 내려앉을 것이다. 가지들은 부지런한 생명 작용으로 떨어진 잎을 거름 삼아 새로운 잎과 ...
칼로리 과잉 시대! 살과의 전쟁, 비만 박정환 한양대학교병원 내분비대사내과 교수 우리는 비만을 미용상의 문제나 다른 질병을 일으키는 위험요소 정도로 단순하게 인식해 왔다. 그러나 비만 환자와 비만 관련 질병이 급격히 늘어나고 이와 관련된 의료비용의 지출도 꾸준히 증가하면서 최근에는 비만을 독립된 질병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비만 환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칼로리 과잉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이 풍족한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은 약 30년 전부터다. 이전...
[글밭산책] [시] 가장 먼 길 이 용 섭 오늘도 나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언제부턴가 나도 몰래 내 안에서 나를 지키는 얼굴 없는 그를 만나러 간다 가장 가깝고 쉬울 줄 알았던 이 길이 가면 갈수록 오지(奧地)처럼 낯설고 아득하다 흙먼지 자갈길을 지나 잡초와 가시덤불을 헤치며 간다 이토록 멀고 힘든 길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처음부터 떠나지도 않았을 것을 마음이 자꾸 내 안에다 후회의 우물을 판다 그러나 어쩌랴 이젠 되돌아갈 수도 없다 너무 오래 전에 떠나온 길이라 남은 날보다 더 멀고 아득해도 어쩔 수 없...
[글밭 산책] [수필] "고마웠데이" 권 영 호 “한번 와 주실래요?” 이른 아침에 걸려온 휴대전화 속, 친구 아내의 목소리는 촉촉이 젖어있었다. “네. 그럴게요.” 옷을 차려입는 둥 마는 둥 대문을 나섰다. 운전대를 잡았다. 불길한 예감이 속 가슴을 두드렸다.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 위에 차를 올렸다. 마음이 바빠졌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핸들을 바투 잡은 나는 K 병원에 입원 중인 친구를 찾아가고 있다.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것은 열아홉 살 되던 해, A 교육대학에 입학식 날이었다. 같은 고향에서 태어나 ...
글밭 산책 [시] 어떤 날은 / 구 은 주 새파란 창틀이었지 아마 그 안에 갇힌 어둑한 하루가 어렴풋이 밝아오고 있었어 그 집 앞으로 자전거가 지나가고 뒤에 앉은 아이가 따뜻한 등에 기대고 있었어 시간은 말이 없었지 말이 없는 시간이 또 지나가고 자전거는 달렸어 아무리 밟아도 펴질 생각이 없는 구부정한 골목을 지나 도랑을 잡고 흐르는 플라타너스 길을 지나고 층층이 한 올 한 올 빛살을 풀고 있는 숲에 다다랐지 숲은 고요한 채 말이 없었어 말이 없는 숲은 듣기만 했어 바람이 가지를 흔드는 소리 햇...
[글밭 산책] [수필] 아들의 개 수필가 박월수 아들이 다녀갔다. 아들의 개도 다녀갔다. 잠깐 동안 집안이 벌집이 되었다 . 잔정이 많은 아들은 유난히 개를 좋아한다. 우리 부부가 시골살이를 원했을 때 아들은 마당 있는 집에서 개를 키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무조건 찬성했다. 약속대로 작고 귀여운 개 두 마리를 키우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아들은 우리 몰래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덩치 큰 녀석을 온라인에서 분양받아 우릴 기겁시켰다. 시간이 흘러 작은 개 하나는 새끼를 낳다 죽었고 허스키는 다른 이에게 보냈다. 남은 개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