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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밭 산책 ----- [수필] 인 연 성 정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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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밭 산책 ----- [수필] 인 연 성 정 애

글밭 산책 -----  [수필]    인 연    성 정 애

                                           

  

사진(성정애)333.jpg


  “스님! 사람은 죽어서 어디로 갑니까?”

  “왔던 곳으로 가겠지.”

  “왔던 곳이 어딘데요?”

  “죽어서 가는 곳”

  “.....”

  “정 알고 싶으면 법당에 계시는 부처님께 물어보시오”

  스님과의 첫 대면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갑자기 돌아가신 친정엄마의 사인이 복용하던 혈압약을 드시지 않았던 것도 한 요인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무심코 내뱉었던 말이 엄마를 죽음으로 내몰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억장이 무너졌다.

  가끔 부모님을 찾아뵐 때면 방 여기저기 널브러진 약봉지를 보면서, 엄마가 어떤 약을 드시는지 잘 챙겨보지도 않고서, 약을 너무 많이 먹는다며 타박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그 말에 엄마가 드시던 혈압약을 끊었다면 내가 엄마를 사지로 몬 불효막심한 딸년인 셈이다.

  그날, 손수 차린 아침상으로 아버지와 오붓이 이승의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산책길에 나섰던 엄마가, 오전 10시에 쓰러지신 후 구급차에 실려 가신 그대로 영면의 길로 떠나버렸다. 아무런 준비 없이 영원한 이별을 맞은 형제자매들의 애통함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함부로 내뱉은 말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죄의식까지 더해진 나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간단없이 허물어져버리는 삶의 허망함에 그 당시 나는 죽음에 탐닉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친구가 나를 데리고 간 절에서, 대면한 스님과 나눈 첫 대화였다. 엄마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힌 어리석은 중생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넬 줄 알았는데, 참으로 냉정하고 뜬금없는 스님이었다. 괴팍하고 무서운 스님이란 말을 친구로부터 듣긴 했지만, 스님의 냉대에 설움이 복받쳐 올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백팔 배로 엄마께 용서를 빌었다. 울고 싶은데 뺨 맞은 격이었다. 실컷 울고 나니 한결 편안한 마음이 되어 시줏돈을 넣으려고 보시함을 찾으니 법당 어디에도 시주함이 없다. 같이 간 친구에게 물으니 스님은 초파일과 백중 때 외에는 일체의 보시를 받지 않는다고 한다.

  엄마의 극락왕생을 비는 마음에 준비해간 시줏돈을 법당의 상단에 놓아두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스님은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여기며 주차장으로 나왔다. 막, 차가 출발하려는데 그 스님께서 법당에 두고 온 봉투를 들고 와서는 부처님이 돈 달라 하더냐며 가져가라 하신다.

  할 수 없이 봉투를 도로 받았는데, 무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백팔 배로 가라앉았던 마음에 야금야금 불길이 일었다. 오는 내내 입을 다물고 화를 삭이고 있는 내게 친구가 부연 설명을 한다. 법당에 보시함이 없는 것은 부처님 팔아 호구지책으로 삼지 않겠다는 스님의 의지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집에서 청소 잘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남편 잘 챙기는 것이 절에 오는 것보다 낫다며 절에 자주 오는 것도 반기지 않는다고도 하였다. 스님에 대한 친구의 설명이 길어질수록 날 섰던 마음이 풀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인연이 되어 그 절에 다니게 되었고, 스님께 다도를 배우게 되었다. 6년의 세월이 지남에 따라 냉정하고 무섭던 스님은 고향의 오라버니같이 편안한 스님으로, 유머 감각이 뛰어난 재미있는 스님으로, 때론 철부지 소년 같은 순수한 스님으로 내 마음에 자리를 잡았다.

  집에 있는 산 부처 잘 모시라는 스님의 지론대로 몇 달 만에 한 번씩 찾아뵈면, 스님은 눈에 띄게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다. 건강이 염려되어 여쭤보면 일절 내색하지 않으시고 늙어서 그렇다는 대답뿐이었다.

  어느 날, 스님이 숨을 못 쉴 정도로 부종이 와서 119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 가서 입원한 지가 꽤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지인이 알려준 병실 호수가 생각이 나질 않아, 안내 데스크에 가서 입원한 스님의 병실을 물었더니 간호사가 스님이라면 ooo씨 말이죠? 라며 되묻는다. 여태껏 스님의 속명을 몰랐는데, 함자를 듣고 보니 귀에 익은 친숙한 이름이었다.

  간호사가 일러준 병실에는 사촌오빠 이름과 똑같은 명패를 붙인 침대에 스님께서 누워계셨다. 스님의 건강상태는 심각한 수준이라 상태가 조금 호전되면 서울의 큰 병원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입원하신 지 두어 달이 지난 어느 날, 스님께서 퇴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문안을 갔다. 동짓날을 하루 앞둔 첫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스님은 입원 전보다 훨씬 가벼운 몸으로 돌아오셨다. 병문안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따뜻한 봄날이 오면 소풍을 가자고 하신다. 뜻밖의 말씀에 영문을 몰라 하니, 마치 오라버니처럼 다정스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며, 놀리듯이 빙긋이 웃으신다. 길상화라는 법명으로 불리던 나는, 그날 처음 내 이름을 부르는 스님을 통해 단번에 4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아득한 옛날로 돌아갔다. 

  

  중학교 3학년, 길고 긴 여름방학을 맞는 날이었다. 종업식을 마치고, 이른 하굣길,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이 되어 참새처럼 조잘조잘 깔깔거리며 비포장 이십 리길 신작로를 걸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가끔 버스라도 지나가면 길옆으로 비켜선 채 손을 흔들어 주던 순진무구한 열 여섯 소녀들이었다.

  그때 뽀얀 먼지를 남기고 털컥대며 지나가는 버스 차창에서 딱지로 접은 종이쪽지가 툭 떨어졌다. 호기심에 주워 펼쳐보니 주소와 이름이 적혀있고 ‘편지하세요’라는 짧은 글귀가 씌어있었다. 

  장난기 많은 친구가 자신의 공책 한 장을 쭉 찢으며 제안을 했다. 이 종이 한 장에 여기 있는 사람 모두의 주소와 이름만 적어서 보내자고 하였다. 신작로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 뒤따라오던 다른 패들까지 합세하여 족히 여남은 명이 자신의 주소와 이름을 적었고, 그것을 우체국 사택에 사는 친구에게 부치라고 주었다. 누구에게 편지가 올지 기대된다며 왁자지껄 깔깔거리는 소녀들의 웃음소리로 그 여름날의 신작로는 생기발랄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방학이 끝난 늦여름 개학 날, 친구들 중에서 나 혼자만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신자의 이력은 이랬다. 그는 대학교 휴학생이었다. 몸이 아파 삶과 공부에 회의를 느껴 복학을 잠시 미루고 있는 浪人이라 했다.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여학생들 모습이 너무 예뻐서 종이쪽지를 날렸고, 나를 선택한 이유는 자기 여동생과 이름이 똑같아 정감이 갔기 때문이라 했다. 그 낭인은 우리를 여고생으로 알고 있었다. 세 번의 편지가 오는 동안 다음 학기에는 복학할 것이라는 다짐도 들어있었다. 서로의 오빠와 동생 이름이 같아 기이하다고 느꼈지만, 나는 감히 답장을 쓰지 못했다. 낭인이라고 자처하는 그 낭인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사전을 찾아보아야 할 정도로 어린 내게, 군대까지 마친 그 대학생은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그렇게 아침이슬 같은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났다.


  신도들이 스님의 신상에 대해 묻지 않는 것은 불문율이고, 스님 또한 신도들에 대한 자세한 이력을 알 턱이 없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내 이름이 자신의 여동생과 같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었다. 신도들과 일체의 잡담을 하지 않는 스님인데, 나와 같이 있을 때면 말씀이 많다는 친구의 말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따뜻한 봄날이 코앞에 다가온 지난 2월 마지막 날, 스님의 열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살아생전은 빈한하게 사셨지만, 극락으로 가는 길은 화려한 불꽃과 함께하셨다. 월정사 다비장에서 한 줌의 재로 이승의 흔적을 지워버린 스님은 온 곳으로 돌아가신 것일까?

  천지간에 낭자한 봄날, 봄 소풍 가자 시던 스님은 월정사 법당의 영정 사진 안에서 사부대중이 올리는 사십구 제의 마지막 독경 소리를 듣고 계신다.

  ‘스님! 봄나들이 약속은 어찌하시렵니까?’

  ‘내가 약속은 제대로 지켰구먼. 예까지 봄나들이 왔잖았소?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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