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산책]---------- 나무의 복명(復命)

기사입력 2021.04.23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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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일 배

    [글밭 산책]---------- 나무의 복명(復命) 


    이 일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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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날마다 오르는 산이지만 오를 때마다 달라 보인다. 봄이 무르녹고 있는 이즈음은 한 시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것도 같다. 오는 봄을 알리던 꽃들이며 온 봄을 화사하게 수놓던 꽃들이 이울면서, 새잎들이 새뜻하게 돋아나고 있다. 아직도 지난해의 낙엽은 그대로 쌓였는데, 새잎들은 나날이 푸름을 더해가고 있다.

      잎들이 푸르러지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한결같은 빛이 아니다. 나무마다 그 빛깔이 조금씩 다 다르다. 연초록도 있고, 진초록도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명도와 채도가 다 다르다. 꽃 지고 돋아나는 생강나무며 진달래 잎의 빛깔도 다르고, 같은 참나무 무리라 하지만 갈참나무, 떡갈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잎도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을 차리고 있다.

      나무의 생김새도 다 다르다. 잎이 길고 짧은 것도 있고, 뾰족하고 둥근 것도 있다. 앙증맞게 작거나 사람 얼굴 하나만치 큼지막한 것도 있다. 둥치며 가지가 손가락처럼 가는 것도 있고, 아름으로 품어도 안지 못할 것도 있다.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솟은 것도 있고, 굽고 휘어진 채 애써 하늘로 향하는 것도 있다. 이 산에 나무들이 이리 지천으로 많아도 같은 빛깔, 같은 모양을 가진 나무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다 다른 나무들에 한결같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 어떤 빛깔, 어떤 모양의 나무든,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가는 나무든 굵은 나무든, 잎을 한때 일제히 돋구었다가 한때 모두 떨군다는 것이다. 어느 나무, 무슨 나무든 예외가 없다. 상록수라 한들 떨어지지 않고 푸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모든 나뭇잎은 떨어져 땅으로 뿌리로 돌아가고 있다.

      나무의 이런 모습을 보고 노자(老子)가 “무릇 만물이 복잡하고 다양하다 해도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된다. 뿌리로 돌아감을 고요[靜]라 하고, 이를 본성으로 돌아옴이라 한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道德經』 16章)”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온갖 초목들이 갖가지의 빛깔과 모습으로 어우러져 무성한 모습을 이루고 있어도 마침내는 모두 제 태어난 뿌리로 돌아간다.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고요[靜]’라 했다. 여기서 ‘고요’란 흙이요, 천성(天性)을 말한다. 이를 일러서 ‘복명(復命)’ 곧 ‘본성(本性)으로 돌아옴’이라 했다. 태어나서 살다가 돌아가는 곳은 ‘본성’이라는 말씀이니, 귀근이 곧 복명이요, 본성에 이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말씀은 또 이어진다. “본성으로 돌아오는 것을 한결같음이라 하고, 그 한결같음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그 한결같음을 몰라 망령되면 흉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고 했다. ‘한결같음’이란 변함없는 진리를 뜻하고, ‘밝음’이란 ‘현명함’으로 새길 수 있다. 모든 것은 세상을 살다가 본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진리이고, 이 진리를 알아야 현명하다는 것이다. 

      노자의 말씀을 상기하며 나무를 다시 본다. 저 잎사귀들도 무성해지는 철을 지나 언젠가는 모두 땅으로 떨어져 내릴 것이다. 지난 것을 말끔히 떨어뜨렸듯이 어느 하나 귀근, 복명의 진리를 어그러뜨림 없이 제 태어난 자리, 본성의 자리로 모두 돌아갈 것이다. 그 진리를 거역하여 그대로 붙어 있기 위해 아웅다웅하는 잎이 있던가. 간혹 봄이 될 때까지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마른 잎도 있지만, 그건 새잎이 날 자리를 지켜주기 위한 일일 뿐이다. 나무는 현명하다. 귀근을 알고 복명의 진리를 어김없이 이행해 내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갖가지 모습, 다 다른 성품으로 살다가 종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람인들 다르랴. 사람도 큰 사람 작은 사람, 강한 사람 약한 사람, 이름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재물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등등 다들 다른 모습으로 살다가 나뭇잎이 뿌리로 돌아가듯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사람도 나무와 삶의 모습이 같은가. 아니다. 마치 몇백 년, 몇천 년을 살 것처럼, 이름을 쫓고 재물에 매달리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온갖 탐욕을 부리다가, 끝내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하고한가. 이들이 어찌 정(靜)으로 돌아가는 귀근을 안다 할 것이며 복명의 진리와 더불어 산다 할 수 있을까. 그 한결같음을 모르고 살다가 비명에 횡사하여 영원히 본성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목도하지 않는가.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나무를 본다. 노자를 듣는다. 그 복명을 보고 듣는다. 산을 내려서는 옹졸한 범부로 돌아갈지언정 이 나무들 앞에 선 순간만은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쌓인 낙엽을 밟으며, 그 복명의 한결같음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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