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밭 산책] --------- 그대로 멈춰라

기사입력 2021.08.13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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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월 수

    [글밭 산책] -------------------- 그대로 멈춰라    

                            

    박 월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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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체위로 포복한다. 몸놀림이 번개다. 다리가 많아 쉰발이란 이름을 가진 그리마는 돈벌레로도 불린다. 따뜻한 걸 좋아해서 옛날 부잣집에 많이 살았던 때문이란다. 이름만으론 호감이 가는 놈이지만 생긴 모양새가 징그러워 집안에서 동거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이 녀석이 출몰하는 곳엔 더 징그러운 바퀴벌레가 얼씬도 못한다지만 그것만으론 설득력이 약하다. 

      습기를 머금고 있다는 황토집의 특성 탓인지, 아니면 난방이 잘 되는 우리 집이 녀석의 구미에 맞는 까닭인지 가끔 실내에서 대면한다. 촉수가 민감해서 움직이는 물체의 출현을 순식간에 감지하고 납작 엎드려 죽은 척 한다. 나는 녀석의 현명함에 매료되어 민첩하게 휴지로 감싸 바깥에 살려주는 너그러움을 선사한다. 녀석의 처세술은 “우선멈춤”이다.

      쉰을 앞두고 엄마들의 사춘기라는 갱년기가 시작되었다. 얼마 안 있어 남편도 같은 증상을 보였다. 둘은 수시로 부딪쳤다. 내 속의 아니무스는 남편의 깊은 곳에 깃들어 사는 아니마를 못견뎌했다. 남편의 아니마는 내 속의 아니무스를 자주 건드렸다. 우리는 서로 당신이 변했다며 섭섭해 했고 자신이 옳다고 우기다가 등 돌리고 잤다.

      내 안에 사는 남자가 우락부락해 질 땐 그의 여자는 참아주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가 데리고 사는 여자는 당최 숙이는 법을 몰랐다. 내 속에 들어온 남자도 인내심이 없기는 매한가지여서 그의 여자가 앙칼지게 쏘아대면 금세 삐쳐버리곤 했다. 내가 알던 나는 어디가고 낯선 내가 거기 있었다. 닮은 영혼이라 생각했던 우리는 휘청거렸고 창가에 제라늄은 저 혼자 시들었다. 다 자란 아이들이 타지로 나가버린 둘만의 식탁은 차츰 온기를 잃어갔다. 

      한 계절이 흘렀다. 그의 여자를 피해 밤 마실을 다녀오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당 끝에 비켜나 있던 국자별이 지붕 한 가운데로 와서 반짝이고 있었다. 어지러운 세상이 아무리 북적거려도 일곱 개의 국자별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제 갈 길을 향해 가고 있었던 거다. 나도 흔들림을 멈추고 제대로 된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집안으로 들어서다 거실을 가로지르는 쉰발이와 마주쳤다. 쉰 개도 넘을 듯한 발을 움직여 녀석이 겁도 없이 내빼는 통에 곁에 있던 책을 살생의 도구로 써 버렸다. 뭉개진 쉰발이에게서 내가 찾던 답을 보았다. 그의 여자가 세상 밖을 나오려 할 땐 나는 나의 남자를 꼭꼭 숨겨두어야 한다는 것을. 내가 먼저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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